녹물 나오는 아파트, 재건축 막히니 차라리 리모델링

인쇄

서울·수도권 단지 추진 활기

전국 아파트의 절반(49.2%)에 이르는 554만 가구는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 이 중 93만 가구는 30년도 더 됐다. 건축 설계·기술 발달로 요즘엔 수명이 100년에 이르는 아파트가 등장하고 있지만, 과거에 지은 아파트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20년만 지나도 녹물이 나오는가 하면 여기저기 손봐야 할 게 많다.

그래도 수리하고 고치면 구조적으로는 어느 정도 보완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주거환경이다. 과거엔 큰 집이 대한 수요가 지금보단 적었기 때문에 오래된 아파트는 중소형 주택형(전용면적 85㎡ 이하) 위주로 구성된 곳이 많다. 

또 지은 지 30년이 넘는 아파트 중 지하주차장을 갖춘 곳은 거의 없다. 지하주차장이 있어도 주차면이 가구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거나,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없다. 요즘 주택 수요가 새 아파트에만 몰리는 것도, 낡은 단지들이 앞다퉈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건축을 위시해 집값을 끌어 올리겠다는 심산도 없지 않겠지만, 주민들이 재건축을 추진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같은 주거환경 개선에 있다. 하지만 재건축 사업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정부가 집값이 들썩인다며 각종 규제로 재건축 사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러자 낡은 아파트 주민들이 재건축을 포기하고 리모델링으로 선회하고 있다. 분당 등 수도권 1기 신도시는 물론 서울 송파·용산구 등지에서도 리모델링을 본격화하는 단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달 초에는 서울 송파구 가락쌍용 1차가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고, 지난달엔 군포 산본신도시 우륵주공 7단지가 조합을 설립했다. 서울 구로·양천구, 용인시 등지에서도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른 단지가 나오고 있다. 우륵주공 7단지 노승만 리모델링조합장은 “주차면이 지금은 가구수의 절반 수준인 649대인데 리모델링을 하면 1579대가 된다”며 “주거환경이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이란 기대에 주민 동의율도 70%를 넘었다”고 전했다.
  
리모델링은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재건축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존 아파트를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재건축과 달리 리모델링은 기존의 아파트 골조를 유지하면서 평면을 앞뒤로 늘려 면적을 키우고, 층수를 올려 주택 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지하주차장을 새로 만들거나 더 넓힐 수 있다. 새로 짓는 게 아니어서 사업도 비교적 쉽게 진행할 수 있다. 재건축은 지은 지 30년이 넘어야 할 수 있지만, 리모델링은 15년 이상이면 된다. 안전진단은 B등급(유지·보수)을 받아도 된다.
  
재건축은 E등급(불량)이거나 최소 D등급(조건부 허용)이어야 할 수 있다. 임대주택 공급 의무가 없고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대상도 아니다. 정부도 재건축보단 사회·경제적 비용이 적게 드는 데다, 집값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만큼 투자(투기)보단 실거주가 목적이라고 보고 적극 장려하고 있다. 허용 여부를 두고 찬반이 갈렸던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2014년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직증축은 최대 3개 층(15층 이하는 2개 층)을 더 올릴 수 있다. 층수를 올리면 가구 수를 늘리기 쉽고, 늘어난 아파트를 일반에 분양해 건축비에 보탤 수 있다. 그래서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허용한 2014년 이후 리모델링은 재건축 대안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분양 물량이 재건축에 비해 적은 편이어서 기대만큼 활성화하지 못했다.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은 가구 수 증가분을 일반분양해 공사비를 충당하는 형태다. 일반분양 물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민 부담이 주는 데, 리모델링은 사업 특성상 가구 수 증가에 한계가 있어 사업 활성화에 걸림돌이 됐다. 하지만 올 들어 집값이 상승세를 보이고, 규제지역이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겹겹의 규제로 재건축은 힘든 상황인 데다 집을 팔아도 비슷한 입지의 새 아파트를 구하기 어렵다 보니 리모델링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정보회사인 부동산114에 따르면 올 6월 말 기준 서울 리모델링 추진 단지 중 추진위원회 단계를 넘어선 곳은 56개 단지 2만6500여 가구다. 지난해 6월 말보다 16곳 1600여 가구가 늘었다. 윤지해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15층 안팎의 중층 단지는 기존 용적률이 높아 재건축을 해도 사업성이 낮은 편이어서 리모델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 활기가 돌자 그동안 남는 게 없다며 리모델링 시장을 등한시 했던 대형 건설사도 시공권 확보 경쟁에 나섰다. 현대건설·GS건설·현대산업개발 등이 잇따라 리모델링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시공사 선정에 착수한 용인시 수지구 현대성우 8단지 리모델링 사업을 두고는 현대건설과 포스코건설이 경쟁하고 있는데, 현대건설의 첫 리모델링 시장 진출이다. 박용석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17조원 정도였던 리모델링 시장이 2025년에는 23조원, 2030년엔 3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기도는 물론 용인·군포시 등 지방자치단체도 관내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지원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당분간 리모델링 사업이 확산할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리모델링 사업이 실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정부가 2013년 리모델링 사업을 통한 가구 수 증가 범위를 기존 가구 수 대비 10%에서 15%로 늘렸지만, 여전히 일부 주민은 ‘차라리 재건축을 하자’는 쪽이다. 재건축이 리모델링에 비해 일반분양 물량이 많고 완전히 새로운 아파트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직증축이 아니면 가구 수를 늘리기 쉽지 않고, 내력벽(아파트의 하중을 받치거나 분산하는 벽) 때문에 평면 설계에도 제약이 많다.
  
요즘은 채광·통풍을 극대화한 4베이(bay) 평면(아파트 전면에 ‘방·방·거실·방’ 배치)이 인기지만, 내력벽을 철거하지 않고는 베이 수를 늘리기 쉽지 않다. 수직증축은 1차 안전진단에서 B등급을 받고 1, 2차 안전성 검토를 거쳐 2차 안전진단까지 받아야 한다. 사업 과정에서 무려 4차례의 안전 관련 심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1차 안전진단에서 C등급을 받으면 곧바로 사업이 가능한 수평증축 방식보다 절차가 복잡하다. 때문에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추진해 온 분당신도시 일부 단지는 2차 안전성 검토 단계에서 사업이 막힌 예도 있다. 일반분양 물량이 30가구 이상이면 리모델링 역시 민간택지로 확대한 분양가 상한제 적용 대상이 된다는 점도 변수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재건축에 비해 이점이 많은 사업이지만 주민들이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찮다”고 말했다. 
    

국토부, 수익성 좌우하는 내력벽 철거 연구 발표 미뤄

 
내력벽 철거 허용 여부에 대한 결론이 올해를 또 넘길 것 같다. 올 상반기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리모델링시 내력벽 실험체 현장재하실험’ 용역이 끝났지만 정부는 계속 발표를 미루고 있다. 내력벽 철거는 재건축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아파트 리모델링 시장의 확대를 위한 핵심 요소다.
  
별도 기둥이 없는 아파트(벽식구조)에선 벽면이 기둥 역할을 한다. 벽 자체가 15층, 21층 높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인 셈이다. 국내 중층 아파트 대부분이 이 같은 벽식구조인데, 리모델링할 때 내력벽을 옮기지 못하면 리모델링 후 아파트 평면은 가로 폭은 좁고, 세로로 긴 비정상적인 모습이 된다. 베이 수를 늘리기도 쉽지 않아 최신 평면으로의 탈바꿈도 어렵다.
  
반대로 내력벽 철거를 허용한다면 리모델링을 통해서도 재건축 아파트 못지 않은 최신 아파트로 바꿀 수 있다. 정부는 2015년부터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의뢰해 내력벽 철거 안전성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발표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당초 2019년 3월에서 7월 말, 또 다시 8월로 두 번 늦춰졌다. 이후 올 초쯤 발표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1년이 다 되도록 발표하지 않고 있다.

건설기술연구원 측은 “이미 올 상반기에 실험을 마치고 검증보고서 초안을 국토부에 제출한 상태”라고 밝혔다. 한승헌 건설기술연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술적으로 평면 확장을 위한 내력벽 일부 철거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건설 업계도 기술적으로는 내력벽 철거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건축 기법의 발달과 기술이 좋아진 덕분이다. 문제는 만에 하나 사고가 생겼을 때 책임이다. 국토부가 내력벽 철거 허용 여부를 계속 미루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건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만에 하나 내력벽 철거로 사고가 생긴다면 결국 그 책임은 국토부가 지게 된다”며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전문가 자문단이 아직 꾸려지지 않았다”며 “전문가 의견 수렴 등 보완 과정을 거쳐 최종 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